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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몽 이야기

뒤숭숭하거나 불길한 기운이 감도는 꿈.

흉몽은 나쁜 일을 예언한다기보다, 이야기로 소리 내어 풀어냄으로써 마음의 불안을 흘려보내던 오래된 지혜였습니다. 어둡고 서늘한 결의 꿈들을 모았습니다.

흉몽 이야기 52편
여기 실린 꿈 이야기와 해몽 풀이는 재미와 위안을 위한 오락 콘텐츠입니다. 실제 길흉화복을 예언하거나 보장하지 않으며, 중요한 결정은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내려 주세요.

흉몽 이야기 1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알 수 없는 낡은 계단을 하염없이 내려가고 있었다. 한 칸 한 칸 디딜 때마다 발밑의 나무가 삐걱거렸고, 아래를 내려다봐도 어둠뿐이라 도무지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서둘러 내려가려다 그만 발을 헛디뎠고, 순간 몸이 허공으로 붕 뜨더니 그대로 곤두박질쳤다. 붙잡을 난간도 없이 떨어지는 속도만 점점 빨라졌고, 귓가에는 바람 가르는 소리만 날카롭게 울렸다. 소리를 지르려 해도 목이 턱 막혀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처럼 조여 왔다. 아무리 팔을 휘저어도 잡히는 것 하나 없이 어둠은 끝없이 이어졌고, 이대로 영영 떨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공포가 온몸을 얼어붙게 했다. 마침내 바닥에 닿기 직전, 온몸이 크게 움찔하며 식은땀에 젖은 채 눈을 떴다.

흉몽 이야기 2

가로등도 없는 어두운 골목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그림자가 끈질기게 나를 뒤쫓아 왔다. 뒤를 돌아볼 용기조차 나지 않아 나는 그저 앞만 보고 달렸다. 그런데 아무리 다리를 움직여도 발이 늪에 빠진 것처럼 무거워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숨이 가빠 오고 심장은 미친 듯이 뛰는데, 그림자는 조금씩 조금씩 간격을 좁혀 왔다. 등 뒤로 서늘한 기운이 닿는 것이 느껴졌고, 나는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목이 콱 막혀 아무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발밑의 어둠이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듯했다.

흉몽 이야기 3

거울 앞에 서서 무심코 입을 크게 벌린 순간, 이가 하나둘씩 뿌리째 흔들리더니 우수수 빠져 손바닥 위로 쌓이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해 이를 손으로 막았지만 소용없었다. 잇몸에서는 검붉은 피가 배어 나와 입술을 타고 흘렀고, 비릿한 맛이 혀끝에 감돌았다. 빠진 이를 다시 제자리에 끼워 넣으려 애썼지만 그때마다 미끄덩하고 흘러내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거울 속의 내 얼굴은 점점 낯설게 일그러졌고, 텅 빈 잇몸만 벌겋게 드러났다.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고, 나는 이 무너지는 것들을 어떻게도 붙잡을 수 없어 그저 떨고만 있었다.

흉몽 이야기 4

시커먼 물속으로 나는 자꾸만 아래로 가라앉았다. 두 팔을 힘껏 저어 위로 오르려 했지만, 몸부림칠수록 수면은 오히려 저 멀리 멀어져만 갔다. 물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사방은 먹물을 풀어 놓은 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폐가 터질 것만 같았고, 입에서 새어 나온 공기 방울만이 위로 흩어졌다. 저 위로는 흐릿한 빛 한 줄기가 어른거렸지만, 손을 뻗어도 결코 닿지 않았다. 무언가 발목을 붙잡아 끌어내리는 듯한 서늘한 감촉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나는 마지막 숨을 삼키며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흉몽 이야기 5

가장 중요한 시험 시간에 그만 늦고 말았다. 나는 헐레벌떡 교실 문 앞에 다다라 문을 두드렸지만, 굳게 닫힌 문은 아무리 밀고 두드려도 열리지 않았다. 안에서는 시험이 한창인 듯 서걱거리는 연필 소리가 새어 나왔다. 텅 빈 복도에는 오직 커다란 벽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째깍째깍 크게 울렸고, 그 소리는 마치 내 남은 시간을 하나씩 깎아 먹는 듯했다. 문득 손에 쥔 답안지를 내려다보니 여전히 새하얗게 텅 빈 채였다. 아무것도 적지 못한 그 종이를 든 채, 나는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발만 동동 굴렀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흉몽 이야기 6

발밑에서 무언가 스멀거리는가 싶더니, 새까만 뱀 한 마리가 내 발목을 칭칭 감아 올라오며 종아리를 사납게 물었다. 날카로운 통증이 다리를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뱀을 떼어 내려 손을 뻗었지만, 몸부림칠수록 뱀은 더욱 단단하게 다리를 조여 왔다. 차갑고 미끄러운 비늘의 감촉에 온몸에 소름이 오싹 돋았고, 다리는 감각이 사라져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뱀의 붉은 혀가 날름거리며 내 얼굴을 노려보는 듯했다. 도와 달라 외치고 싶었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고,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조여 오는 어둠을 견딜 뿐이었다.

흉몽 이야기 7

번화한 거리 한복판에 서 있는데, 문득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온몸이 화끈 달아오르며 얼굴이 새빨개졌다. 사람들은 저마다 나를 힐끔거리며 수군대고 지나갔고, 어떤 이는 노골적으로 손가락질을 했다. 나는 두 팔로 몸을 가리며 숨을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지만, 사방이 훤히 트인 거리에는 몸을 숨길 만한 그늘 한 조각 없었다. 골목으로 뛰어들려 해도 발이 말을 듣지 않았고, 사람들의 시선은 사방에서 화살처럼 나를 향해 꽂혔다. 부끄러움과 두려움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고, 나는 그 자리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그저 웅크릴 뿐이었다.

흉몽 이야기 8

낡은 집 천장 한구석에서 검은 물이 뚝, 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몇 방울이었지만, 이내 물은 벽을 타고 스멀스멀 흘러내려 방 안으로 번져 들었다. 벽지가 검게 물들며 축 늘어졌고, 물은 순식간에 발목까지 차올랐다. 그 물에서는 하수구 밑바닥 같은 알 수 없는 비린내가 진동해 속이 메스꺼웠다. 나는 문을 열고 나가려 했지만 문틈으로도 시커먼 물이 밀려들어 왔다. 발밑의 물은 어느새 무릎까지 차올랐고, 차갑고 끈적한 감촉이 온몸을 조여 왔다. 이 집 전체가 검은 물속으로 서서히 가라앉는 듯한 불길한 예감에 나는 오싹 소름이 돋았다.

흉몽 이야기 9

손에 꼭 쥐고 있던 열쇠가 순식간에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나는 황급히 주머니와 바닥을 더듬었지만 어디에도 열쇠는 없었고, 눈앞의 어떤 문도 열 수 없었다. 그 사이 등 뒤에서는 저벅저벅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이 문 저 문 손잡이를 미친 듯이 흔들었지만 하나같이 굳게 잠겨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발소리는 어느새 바로 등 뒤까지 다가왔고, 서늘한 숨결이 목덜미에 닿는 듯했다. 도망치려 발을 떼려 했지만 몸은 얼음처럼 굳어 버려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잠긴 문 앞에서 다가오는 무언가를 그저 등으로 느끼며 떨었다.

흉몽 이야기 10

짙은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숲길을 걷다가 나는 그만 길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뿌연 안개 속에서, 방향을 바꿔 걸을 때마다 어김없이 똑같은 갈림길이 눈앞에 나타났다. 마치 제자리를 뱅뱅 도는 것만 같았다. 축축한 안개가 얼굴에 달라붙었고, 발밑에서는 낙엽 밟히는 소리만 스산하게 울렸다. 그때 멀리 어딘가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낮고 음산한 목소리로 나직이 불렀다. 돌아보아도 뿌연 안개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목소리는 방향을 종잡을 수 없이 사방에서 들려왔고, 나는 오도 가도 못한 채 안개 속에 갇혀 버렸다.

흉몽 이야기 11

타고 있던 버스가 갑자기 브레이크를 놓친 듯 가파른 내리막길을 무섭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운전기사는 필사적으로 페달을 밟았지만 버스는 점점 더 속도를 높였다. 나는 앞자리 손잡이를 두 손으로 힘껏 붙잡았지만, 급한 경사에 몸이 붕 떠올라 자리에서 튕겨 나갈 것만 같았다. 창밖으로는 가로수와 건물들이 아득히 뒤로 흘러가며 뿌옇게 번졌다. 승객들의 비명이 버스 안을 가득 메웠고, 바퀴가 노면을 긁는 날카로운 소리가 귀를 찢었다. 저 앞 굽은 길이 눈 깜짝할 새 다가오는데도 버스는 멈출 줄을 몰랐고, 나는 심장이 곤두박질치는 아득한 공포에 눈을 질끈 감았다.

흉몽 이야기 12

잔잔하던 바다가 순식간에 요동치더니, 거대한 파도가 새까만 벽처럼 하늘 높이 솟아올라 해변으로 밀려왔다. 그 그림자만으로도 온 세상이 어두워졌다. 나는 필사적으로 뭍을 향해 달렸지만, 뛸수록 발이 젖은 모래에 깊이 파묻혀 좀처럼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등 뒤에서는 산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점점 커졌고, 짠 물보라가 목덜미로 흩뿌려졌다. 뒤를 돌아보니 파도의 시커먼 벽이 하늘을 온통 가리고 있었다. 도망칠 곳도 붙잡을 것도 없었다. 파도의 차가운 그림자가 순식간에 나를 뒤덮었고, 나는 그 거대한 어둠 속으로 통째로 삼켜지고 말았다.

흉몽 이야기 13

인기척 하나 없는 빈 집에서 나는 방문을 하나씩 열어 나갔다. 그런데 문을 열 때마다 그 너머에는 또 다른 텅 빈 방이 끝없이 이어졌다. 어느 방이든 똑같이 휑하고 먼지만 뽀얗게 앉아 있었으며, 창으로 드는 빛조차 잿빛으로 흐렸다. 몇 번째 문인지도 헤아릴 수 없을 무렵, 어느 방에선가 나지막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바로 곁에서 누군가 숨 쉬는 소리였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사람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그 보이지 않는 숨소리에 등골이 서늘해져 문을 닫으려 했지만, 닫는 순간 또 다른 빈방의 문이 스르르 열렸다. 나는 끝없는 빈방에 홀로 갇혀 버렸다.

흉몽 이야기 14

손끝을 내려다보니 손톱이 스르륵, 얇은 껍질처럼 벗겨져 떨어지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아프지 않았다. 그 무통이 오히려 오싹함을 키웠다. 나는 바닥에 흩어진 손톱을 급히 주워 담았다. 손바닥 가득 모아도 손끝은 자꾸 텅 비어만 갔다. 하나가 떨어지면 또 하나, 마치 몸이 조용히 나를 버리는 것 같았다. 살점이 드러난 손끝은 차갑고 밋밋했고, 아무리 문질러도 감각이 돌아오지 않았다. 주워 담은 손톱들은 손안에서 재처럼 부스러졌다. 나는 텅 빈 열 손가락을 펼친 채, 무엇을 잃어버린 건지도 모른 채 오래 떨었다.

흉몽 이야기 15

먹구름이 순식간에 하늘을 삼켰다. 낮이 밤처럼 어두워지더니 시커먼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물이 아니라 먹물 같았다. 빗물이 닿는 자리마다 담벼락도, 나뭇잎도, 길바닥도 검게 물들어 갔다. 나는 처마 밑으로 몸을 피했지만 검은 얼룩은 발끝까지 번져 왔다. 거리를 오가던 사람들이 소리 하나 없이, 연기처럼 스르르 흩어져 사라졌다. 비명도, 발소리도 없었다. 세상이 통째로 색을 잃어 가는 동안 나만 홀로 남겨진 듯했다. 검은 비는 그칠 줄 몰랐고, 나는 젖은 발을 떼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흉몽 이야기 16

엘리베이터에 오르자마자 케이블이 끊긴 듯 몸이 붕 떴다. 상자가 뚝,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층수 표시등이 미친 듯이 위아래로 깜빡였다. 나는 벽에 붙은 비상 버튼을 있는 힘껏 눌렀지만 버튼은 딱딱하게 굳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발밑의 바닥이 스르르 꺼지는 듯한 감각에 명치가 조여 왔다. 손잡이를 붙들어도 몸이 자꾸 위로 떠올랐고, 귀에는 쇠가 긁히는 날카로운 소리만 가득했다. 몇 층인지, 얼마나 남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떨어지는 속도만 점점 빨라졌고, 끝이 오기 직전의 그 아득한 공포가 심장을 짓눌렀다.

흉몽 이야기 17

복도 끝에 누군가 서 있었다. 사람 형체는 분명한데 얼굴이 없었다. 눈도 입도 없는 매끈한 자리가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나는 얼른 뒷걸음질을 쳤다. 그런데 물러설수록 이상하게 거리가 좁혀졌다. 내 걸음보다 그의 다가옴이 언제나 한 발 빨랐다. 뻗어 온 손끝에서 서늘하고 축축한 냉기가 뿜어져 나와 내 뺨을 스쳤다.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돌아서 뛰려 해도 다리가 진창에 박힌 듯 무거웠고, 얼굴 없는 그림자는 여전히 손을 내민 채 소리 없이 나를 따라왔다.

흉몽 이야기 18

새하얀 옷을 차려입고 잔칫집에 들어섰다. 흥겨워야 할 자리인데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를 외면했다. 눈이 마주치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고, 아무도 내게 말을 붙이지 않았다. 상 위에 그득하던 음식은 내가 손을 뻗는 순간 잿빛으로 바스러졌다. 김이 오르던 국도, 붉던 떡도 회색 재로 내려앉았다. 그때 등 뒤에서 낮게 곡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군가 아주 오래 울어 온 듯한 소리였다. 돌아보려 했지만 목이 굳어 돌아가지 않았고, 하얀 옷자락만 서늘하게 흔들렸다.

흉몽 이야기 19

기차는 쉬지 않고 달렸다. 내가 내려야 할 역이 창밖으로 다가왔다. 나는 문 앞에 섰다. 문이 스르르 열렸는데도 발이 도무지 떨어지지 않았다. 발바닥이 바닥에 붙어 버린 듯 무거웠다. 문이 닫히고 기차는 또 달렸다. 다음 역에서도, 그다음 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열린 문 너머로 아는 얼굴들이 하나씩 스쳐 지나갔다. 손을 흔들어 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도, 걸음도 나오지 않았다. 익숙한 풍경이 점점 낯설게 바뀌어 갔고, 나는 내리지 못한 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를 어둠 속으로 실려 갔다.

흉몽 이야기 20

손에 쥔 휴대폰 화면이 거미줄처럼 쩍 갈라져 있었다. 급히 번호를 눌렀지만 숫자는 하나도 찍히지 않았다. 화면은 깨진 유리 밑에서 멋대로 흔들렸다. 도움을 청해야 했다. 나는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입만 벌어질 뿐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목 안에서 소리가 통째로 사라진 듯했다. 몇 번이고 다시 외쳐도 마찬가지였다. 깨진 화면에는 내 겁먹은 얼굴만 조각조각 비쳤다. 손가락으로 몇 번이고 화면을 문질러도 금은 더 벌어지기만 했다. 아무에게도 닿지 못하는 외침을 삼키며, 나는 가슴이 꽉 막힌 채 그 자리에서 홀로 발만 굴렀다.

흉몽 이야기 21

발밑의 땅이 쩍, 소리를 내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시커먼 틈이 뱀처럼 길게 벌어졌다. 나는 반대편으로 건너뛰려고 몸을 날렸다. 그런데 발을 구르는 순간마다 틈은 마치 나를 놀리듯 더 넓게 입을 벌렸다. 아무리 도약해도 반대편 땅은 점점 멀어져만 갔다. 갈라진 틈 아래에서는 서늘하고 축축한 바람이 올라와 발목을 휘감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이 나를 빨아들이려는 듯했다. 딛고 선 땅마저 조금씩 좁아졌다. 나는 점점 줄어드는 발판 위에서, 언제 무너질지 모를 균형을 아슬아슬하게 붙들고 있었다.

흉몽 이야기 22

잠에서 깨어 보니 온 방이 거미줄로 뒤덮여 있었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하얀 실이 겹겹이 늘어졌고, 문고리까지 끈끈하게 엉겨 붙어 있었다. 나는 나가려고 두 팔로 거미줄을 헤쳤다. 그런데 헤칠수록 실은 도리어 손목과 발목에 칭칭 감겼다. 끈적한 줄이 살에 달라붙어 떼어 내려 할수록 더 옥죄었다. 방 한구석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스멀스멀 꿈틀거렸다. 다리가 여럿인 그림자였다. 그것은 서두르지 않았다. 내가 발버둥 칠수록 줄이 팽팽해졌고, 어둠 속의 무언가는 실을 따라 조금씩, 조금씩 내게로 다가왔다.

흉몽 이야기 23

지갑을 잃어버렸다. 나는 온 거리를 헤매며 바닥을 뒤졌다. 갔던 길을 되짚고 골목마다 들여다봤지만 지갑은 어디에도 없었다. 혹시나 싶어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분명 아까 만졌던 것 같은데 손끝에 잡히는 건 텅 빈 안감뿐이었다. 넣어 둔 물건들도 하나둘 사라져 갔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물으려 했지만, 사람들은 나를 못 본 척 무심히 스쳐 지나갔다. 내가 아무리 손을 흔들어도 그들의 눈에는 내가 없는 듯했다. 텅 빈 주머니와 텅 빈 거리 사이에서, 나는 무엇을 잃은 건지도 잊은 채 계속 헤맸다.

흉몽 이야기 24

밤길을 혼자 걷고 있었다. 저만치 앞의 가로등이 툭, 소리 없이 꺼졌다. 이어 그다음 것도, 또 그다음 것도 하나씩 불이 나갔다. 어둠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내 뒤를 바짝 따라왔다. 나는 걸음을 재촉했지만 불빛은 나보다 빠르게 사라져 갔다. 마침내 마지막 가로등마저 꺼지자 세상이 통째로 먹빛이 되었다. 그 순간, 발소리가 이상하게 두 개로 들렸다. 하나는 내 것, 다른 하나는 반 박자 늦게 따라붙는 낯선 소리였다. 걸음을 멈추면 그 소리도 멈췄다. 돌아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나는 숨을 죽인 채 어둠 속으로 계속 걸어 들어갔다.

흉몽 이야기 25

골목에 들어서자 커다란 개 여러 마리가 나를 둘러쌌다. 시뻘건 잇몸과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채, 놈들은 사방에서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 왔다. 낮게 깔린 으르렁 소리가 배 속을 울렸다. 나는 옆 담벼락으로 달려들어 기어오르려 했다. 그런데 손이 자꾸 미끄러졌다. 벽돌 틈에 손톱을 박아도 몸은 다시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사이 개들의 으르렁거림은 점점 커지고 가까워졌다. 뜨거운 숨이 종아리에 닿는 것 같았다. 담은 넘을 수 없을 만큼 높았고, 뒤에는 이빨뿐이었다. 나는 벽에 매달린 채 발버둥 치며, 등 뒤로 다가오는 그 소리에 온몸이 굳어 갔다.

흉몽 이야기 26

가족들과 둘러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익숙한 밥상,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그런데 문득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말을 걸어도 다들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듯 서먹하게 굴었다. 나는 다급히 내 이름을 말했다. 엄마도, 형제도 그저 낯선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것 같았다. 내려다보니 내 손이, 팔이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다. 밥그릇을 쥐어도 감촉이 흐릿했다. 나는 조금씩 투명해지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 한가운데에서, 나는 아무에게도 닿지 못한 채 조용히 지워져 갔다.

흉몽 이야기 27

정신을 차려 보니 높은 벼랑 끝에 서 있었다. 발밑의 흙이 조금씩, 부슬부슬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나는 뒤로 물러서려고 몸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몸은 자꾸만 앞으로, 벼랑 아래를 향해 기울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등을 미는 것 같았다. 발가락 끝의 흙이 자갈째 굴러떨어져 까마득한 아래로 사라졌다. 소리조차 되돌아오지 않을 만큼 깊었다. 균형을 잡으려 팔을 허우적거릴수록 발판은 더 좁아졌다. 심장이 목까지 치받쳐 올랐다. 나는 무너지는 흙 위에서, 앞으로 쏟아질 것 같은 몸을 겨우 붙든 채 숨도 못 쉬고 매달려 있었다.

흉몽 이야기 28

건물에 불이 났다. 매캐한 연기가 복도를 가득 메웠다. 나는 출구를 찾아 정신없이 달렸다. 그런데 복도는 아무리 가도 끝이 없이 미로처럼 꼬여 있었다. 같은 모퉁이를 몇 번이고 다시 도는 것 같았다. 연기는 점점 짙어져 목을 옥죄어 왔고, 매운 기운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벽에 붙은 초록색 비상구 표시를 따라갔지만, 화살표는 갈 때마다 자꾸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오른쪽을 가리키던 것이 다음 순간엔 왼쪽을, 그다음엔 왔던 길을 가리켰다. 열기가 등 뒤에서 밀려왔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출구인 줄 알았던 또 다른 막다른 벽 앞에 멈춰 섰다.

흉몽 이야기 29

새벽에 화장실에서 손을 씻다가 무심코 거울을 올려다보았다. 거울 속 내 얼굴이 나를 따라 하지 않고 혼자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손을 들어 뺨을 만지자 거울 속 손은 미동도 없이 그대로였고, 대신 그 얼굴의 입꼬리만 스르르, 아주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나는 웃지 않았는데도 거울 속 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등줄기가 서늘해져 뒷걸음질을 쳤지만 거울 속 눈동자는 계속 나를 좇았다. 저 안에 있는 것이 정말 나인지, 아니면 오래전부터 나인 척하며 기회를 엿보던 무언가인지 알 수 없었다. 불을 끄자 어둠 속에서도 그 미소만이 희미하게 떠 있었다.

흉몽 이야기 30

설거지를 하려고 수도를 트는 순간, 탁한 물이 부엌 싱크대에서 꿀럭거리며 역류하기 시작했다. 시커먼 물은 배수구를 넘어 순식간에 바닥을 덮고 온 집 안으로 넘쳐흘렀다. 발목을 감는 물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검은 수면 위로 낯익은 물건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어릴 적 쓰던 컵, 잃어버린 줄 알았던 사진, 돌아가신 할머니의 안경까지. 손을 뻗어 붙잡으려 하면 물건들은 소리 없이 검은 물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물은 무릎까지, 다시 가슴까지 차올랐고 나는 떠오르는 기억들 사이에서 발 디딜 곳을 잃은 채 서 있었다.

흉몽 이야기 31

한밤중에 누군가 현관문을 천천히 두드렸다. 똑, 똑, 똑. 일정한 간격의 노크가 고요한 집 안에 무겁게 울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구멍으로 밖을 내다보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불빛 하나 없는 텅 빈 어둠뿐이었다. 이상한 기분에 서둘러 문을 잠그고 돌아서는데, 이번엔 등 뒤에서 소리가 났다. 똑, 똑, 똑. 방금과 똑같은 노크였다. 그런데 그 소리는 바깥이 아니라 문 안쪽, 그러니까 나와 같은 공간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얼어붙어 뒤를 돌아볼 용기를 내지 못했다. 노크는 점점 가까워졌고, 어느새 바로 내 귓가에서 울렸다.

흉몽 이야기 32

잠에서 깬 줄 알았는데 온몸이 돌처럼 굳어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눈꺼풀은 무겁게 내려앉으려 했고 숨소리마저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때 방 한구석에서 검은 그림자가 스르르 형체를 갖추더니 천천히 나를 향해 다가왔다. 소리를 지르려 해도 목구멍이 막힌 듯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고, 도망치려 발버둥 쳐도 몸은 침대에 못 박힌 듯 꼼짝하지 않았다. 그림자는 점점 커져 내 얼굴 위로 드리워졌고, 차가운 무게가 가슴을 짓눌렀다. 나는 식은땀만 뻘뻘 흘리며 그것이 지나가기만을, 이 마비가 풀리기만을 속으로 애타게 빌었다.

흉몽 이야기 33

가벼운 마음으로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는데, 걸을수록 나무들이 빽빽하게 우거져 하늘이 한 뼘도 보이지 않았다. 대낮인데도 숲은 저녁처럼 어두웠고 새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정적만이 무겁게 깔렸다. 문득 불안해져 되돌아가려고 몸을 돌리자, 방금 지나온 길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발자국조차 남지 않은 낯선 나무들만 사방을 에워쌌다. 어느 쪽으로 몇 걸음을 옮겨도 풍경은 똑같았고, 나뭇가지들은 마치 나를 가두려는 듯 점점 촘촘히 얽혀 들었다. 축축한 이끼 냄새 속에서 나는 방향을 완전히 잃은 채, 숲이 나를 삼키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흉몽 이야기 34

손에 촛불 하나를 쥐고 어두운 복도를 걷고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데도 촛불은 자꾸만 파르르 떨다가 꺼졌다. 성냥을 그어 다시 불을 붙여도 몇 걸음 못 가 곧 사그라들었다. 그럴 때마다 어둠은 조금씩, 발끝에서부터 무릎으로, 다시 허리로 차올라 왔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나를 에워싸며 삼키려 들었다. 남은 성냥은 몇 개 되지 않았고, 그마저도 눅눅해져 잘 켜지지 않았다. 마지막 불꽃이 손끝에서 흔들리는 순간, 나는 이 어둠이 그저 빛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나를 기다려 온 무언가라는 것을 직감했다. 촛불이 완전히 꺼지자 사방이 새까맣게 닫혔다.

흉몽 이야기 35

눈을 떠 보니 처음 보는 낯선 방 안이었다. 회색빛 벽으로 사방이 막혀 있었고, 아무리 둘러봐도 문도 창문도 하나 없었다. 나가는 길을 찾아 벽을 두드려 보았지만 소리는 이상하리만치 먹먹하게 먹혀 아무 울림도 돌아오지 않았다. 벽은 두드릴수록 물컹하게 손을 밀어냈다. 그때 문득 위를 올려다보니 천장이 아주 천천히, 눈치채기 힘들 만큼 조금씩 내려오고 있었다. 처음엔 착각인가 싶었지만 손을 뻗어 재어 보니 분명 아까보다 낮아져 있었다. 소리쳐도 삼켜지고, 밀어도 밀리지 않는 방 안에서 나는 점점 좁아지는 공간에 갇힌 채 숨을 헐떡였다.

흉몽 이야기 36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끝없이 이어지는 오르막을 오르고 있었다. 처음엔 견딜 만했지만 한 걸음 뗄 때마다 등의 짐은 거짓말처럼 조금씩 더 무거워졌다. 어깨끈이 살을 파고들었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저 위로 보이는 정상만 넘으면 될 것 같아 이를 악물고 걸음을 재촉했지만, 다가갈수록 정상은 오히려 저 멀리 물러났다. 아무리 올라도 눈앞의 능선은 결코 가까워지지 않았다. 땀이 눈을 찔렀고 숨은 턱까지 차올랐다. 뒤를 돌아보니 내가 지나온 길도 똑같은 오르막이어서 내려갈 곳조차 없었다. 나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비탈 위에서, 점점 무거워지는 짐과 함께 홀로 남겨졌다.

흉몽 이야기 37

갑자기 거센 바람이 몰아치더니 집이 통째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지붕이 뜯겨 하늘로 날아가 버렸고, 벽이 하나씩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무너지는 잔해 속에서 붙잡을 만한 기둥을 찾아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은 모래처럼 부스러지며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발밑의 바닥마저 갈라져 기울었다. 바람은 내 몸을 붕 띄웠고, 소중히 여기던 것들이 눈앞에서 산산이 흩어져 날아갔다. 나는 아무것도 붙들지 못한 채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지켜야 할 것을 하나도 지키지 못하고 모든 게 무너져 내리는 광경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흉몽 이야기 38

길을 걷다 발밑의 물웅덩이를 무심코 들여다보았다. 수면에는 내 얼굴 대신 처음 보는 낯선 이가 비쳐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 텅 빈 눈으로, 물속에서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놀라 뒷걸음질을 치려는데 그 얼굴이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홀린 듯 웅덩이에 손을 담그자, 물속에서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이 불쑥 올라와 내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그 손은 놀랄 만큼 억센 힘으로 나를 물 아래로 끌어당겼다. 발버둥 칠수록 얕던 웅덩이는 깊은 우물처럼 나를 삼켰고, 차가운 어둠이 발목을, 무릎을, 온몸을 휘감아 아래로, 아래로 끌고 내려갔다.

흉몽 이야기 39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 섰다. 한 계단씩 조심스레 발을 디디며 내려갔지만, 계단은 끝없이 이어져 아무리 내려가도 바닥에 닿지 않았다. 층계참을 돌 때마다 똑같은 계단이 또 나타났고, 공기는 점점 차갑고 눅눅해졌다. 다리가 아파 와 이쯤에서 돌아가야겠다 싶어 위를 올려다본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처음 들어온 입구마저 저 높은 곳에서 까맣게 닫혀 있었다. 올라갈 길도, 내려갈 끝도 없이 오직 어둠 속 계단만이 무한히 뻗어 있었다. 발소리만이 텅 빈 공간에 메아리쳤고, 나는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는 계단 한가운데 홀로 갇혀 있었다.

흉몽 이야기 40

새로 산 신발을 신고 기분 좋게 첫발을 내디뎠다. 그런데 발을 떼자마자 밑창이 쩍 소리를 내며 뜯어졌고, 동시에 발이 질척한 진창 속으로 쑥 빠져 버렸다. 빼내려고 다리에 힘을 줄수록 진흙은 더 깊이, 더 끈질기게 발목을 붙들고 늘어졌다. 몸부림칠수록 무릎까지, 허벅지까지 잠겨 들었다. 진흙에서는 시체처럼 차가운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와 다리를 타고 온몸으로 번졌다. 새 신발은 진작 벗겨져 검은 진흙 속으로 사라졌고, 손을 뻗어 붙잡을 만한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늪은 소리 없이 나를 삼켜 내려갔고, 나는 차오르는 차가움에 점점 감각을 잃어 갔다.

흉몽 이야기 41

잿빛 하늘을 무리 지어 날던 까마귀 떼가 갑자기 방향을 홱 틀었다. 수십, 수백 마리의 검은 새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곤두박질치듯 내리꽂혔다.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사방을 찢었고, 검은 그림자가 순식간에 머리 위를 뒤덮었다. 나는 황급히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지만, 세찬 날갯짓 소리가 귓가를 가득 메워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부리와 발톱이 팔과 어깨를 스쳤고, 깃털이 눈앞에 흩날렸다. 아무리 손을 휘저어도 새들은 끝없이 몰려들었다. 온 세상이 검은 날개로 뒤덮여 빛 한 줄기 보이지 않았고, 나는 그 요란한 어둠 한가운데서 웅크린 채 벌벌 떨었다.

흉몽 이야기 42

누군가 내게 남긴 편지를 손에 들고 조심스레 펼쳤다. 그런데 읽으려는 순간, 종이 위의 글자들이 눈앞에서 스르르 흐려지더니 하나씩 지워지기 시작했다. 급한 마음에 다시 써 넣으려 펜을 들었지만, 잉크는 물에 번지듯 흩어져 아무 자국도 남기지 못했다. 중요한 말이 분명 거기 적혀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끝내 알아볼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봉투 안을 확인하려 뒤집자, 안에서는 편지 대신 잿빛 재만 우수수 쏟아져 손바닥에 내려앉았다. 재는 손가락 사이로 흩어져 바람에 날아갔고, 전하려던 이도 전하려던 말도 영영 사라져 버렸다는 서늘한 예감만이 남았다.

흉몽 이야기 43

방바닥에 앉아 있는데, 잔잔하던 바닥이 갑자기 물처럼 출렁이기 시작했다. 딱딱하던 마루가 순식간에 흐물흐물 녹아 흐르더니 내 발을 스르르 삼켰다. 놀라 일어서려 했지만 발 디딜 곳이 없었다. 방 안의 가구들이 하나둘 둥둥 떠올라 물결 위를 표류했고, 익숙하던 방은 출렁이는 검은 바다로 변해 있었다. 붙잡을 것을 찾아 손을 뻗어도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나는 거센 물살에 이리저리 떠밀렸다. 벽도 천장도 일렁이며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했다. 딛고 선 세상이 이토록 허무하게 무너져 흐를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속절없이 파도에 실려 떠내려갔다.

흉몽 이야기 44

거리에 사람이 가득했다. 어깨가 서로 닿을 만큼 빽빽했는데, 이상하게도 모두 나를 등지고 한 방향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 사이를 헤치며 무엇을 보는지 확인하려 했지만, 등과 등 사이의 틈은 자꾸 좁아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인 골목 끝에는 시커먼 문 하나가 소리도 없이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그 안쪽은 빛이 닿지 않는 새까만 공허였다. 문틈에서 서늘한 바람이 새어 나와 내 목덜미를 훑었고, 군중은 홀린 듯 한 걸음씩 그리로 다가섰다. 나는 소리치고 싶었지만 목이 잠겨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문은 점점 더 크게 벌어졌고, 내 발도 어느새 그쪽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흉몽 이야기 45

이가 흔들리는 느낌이 불쾌해 손으로 만졌더니, 어금니 하나가 맥없이 뿌리째 뽑혀 나왔다. 놀라서 다시 만지자 이번엔 우두둑 소리와 함께 한 움큼이 손바닥으로 쏟아졌다. 피 맛도 없이 그저 마른 조각들만 손 안에 굴러다녔다. 급히 거울 앞으로 달려가 입을 벌리니, 잇몸만 허옇게 드러난 채 입안이 텅 비어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보려 입을 움직였지만 새어 나오는 건 바람 빠지는 소리뿐이었다. 목소리를 잃은 나는 거울 속의 낯선 얼굴을 마주하며, 이 텅 빈 입으로는 이제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다는 사실에 온몸이 서늘해졌다.

흉몽 이야기 46

낡은 나무배 위였다. 발밑으로 검은 물이 스며들더니 순식간에 발목까지 차올랐다. 나는 두 손으로 정신없이 물을 퍼냈지만, 퍼내는 속도보다 차오르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노를 잡고 힘껏 저어도 배는 한 뼘도 나아가지 못한 채 제자리에서 맴돌기만 했다. 사방을 둘러보니 조금 전까지 보이던 육지가 잿빛 안개 속으로 완전히 삼켜져 있었다. 어디가 물이고 어디가 하늘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물은 어느새 무릎을 넘어 허리까지 차올랐고, 팔에는 더 이상 힘이 남지 않았다. 나는 가라앉는 배 위에서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차가운 물이 가슴까지 밀려오는 것을 그저 지켜보았다.

흉몽 이야기 47

환하던 방의 전등이 이유도 없이 하나씩, 마치 누군가 손으로 하나하나 꺼뜨리듯 어두워졌다. 마지막 불빛이 사라지자 벽에 걸린 시계마저 초침을 멈췄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 나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초침의 규칙적인 소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낯선 숨소리가 들려왔다. 들이쉬고 내쉬는 그 호흡은 방 안 어딘가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천천히 반복되고 있었다. 내 것이 아니었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는 듯했고, 나는 움직이면 들킬 것 같아 손끝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어둠이 손에 잡힐 듯 무겁게 내려앉았고, 그 숨소리는 바로 내 귓가에서 멈추었다.

흉몽 이야기 48

맑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져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새의 그림자가 해를 통째로 가린 채, 마을 위를 천천히 맴돌고 있었다. 날갯짓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오직 서늘한 그늘만이 땅 위를 미끄러졌다. 그림자가 스치는 집마다 창문의 불빛이 하나씩 꺼졌다. 마치 그늘 아래로 들어가면 온기가 모조리 빨려 나가는 듯했다. 사람들은 문을 걸어 잠갔지만 소용없었다. 그림자는 골목을 따라 흐르며 마을 전체를 검게 물들였다. 이윽고 그 거대한 그늘이 내가 선 자리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하늘을 뒤덮은 어둠이 마지막으로 나를 덮쳤고, 세상이 완전히 캄캄해졌다.

흉몽 이야기 49

인파로 북적이는 거리에서 나는 소중한 사람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런데 밀려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 손이 스르르 미끄러지더니, 순식간에 손끝이 놓쳐졌다. 그 사람은 물살에 휩쓸리듯 인파 속으로 멀어져 갔다. 나는 목이 터져라 이름을 불렀지만, 돌아보는 그의 얼굴은 점점 작아지기만 했다. 뒤따라가려 발을 떼려는데, 두 다리가 땅에 붙어버린 듯 도무지 떨어지지 않았다. 발버둥 칠수록 몸은 더 무거워졌고, 사람들의 물결은 우리 사이를 자꾸 갈라놓았다. 뒷모습이 점 하나로 사라지는 순간까지 나는 손을 뻗은 채 그 자리에 못 박혀 있었다. 놓친 온기가 아직 손바닥에 남아 더 아팠다.

흉몽 이야기 50

안개 낀 골짜기에 낡은 나무다리가 걸려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널빤지를 밟으며 건너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발을 뗄 때마다 방금 지나온 널빤지가 툭, 툭 부서져 까마득한 강물로 떨어졌다. 돌아갈 길이 등 뒤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절반쯤 건넜을 때, 앞쪽 널빤지들마저 우수수 무너져 내렸다. 어느새 나는 앞도 뒤도 끊긴 채, 겨우 발 하나 디딜 만한 좁은 판자 위에 홀로 남겨졌다. 아래에서는 검은 물살이 소용돌이치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다리는 후들거렸고, 판자는 삐걱대며 조금씩 기울었다.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이, 나는 허공에 매달린 그 한 뼘 위에서 숨만 겨우 몰아쉬었다.

흉몽 이야기 51

거울 앞에서 이를 닦는데 갑자기 앞니 하나가 툭 하고 맥없이 빠졌다. 놀라 손으로 받치자 뒤이어 이가 우수수 쏟아지기 시작했고, 손바닥은 순식간에 하얀 이들로 가득 찼다. 아무리 입을 틀어막아도 이는 손가락 사이로 끝없이 빠져나왔고, 거울 속 내 얼굴은 점점 낯선 사람의 것으로 일그러져 갔다.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목구멍이 막힌 듯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고, 발밑으로 빠진 이들이 데굴데굴 굴러 어두운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그 복도 깊은 어둠 속에서 누군가 나를 조용히 기다리는 듯한 서늘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등줄기가 오싹해져 뒤돌아 도망치려는 순간, 온몸에 식은땀을 흥건히 흘리며 겨우 눈을 떴다. 심장이 한참을 쿵쿵 뛰었다.

흉몽 이야기 52

어두운 골목을 걷는데 뒤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림자가 계속 나를 따라왔다. 걸음을 빨리하면 그림자도 빨라졌고, 뛰기 시작하자 다리가 물속을 달리는 것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무리 힘을 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골목은 돌고 돌아 자꾸만 같은 자리로 돌아왔다. 가로등은 하나둘 꺼져 갔고, 마침내 그림자의 차가운 손이 어깨에 닿으려는 순간, 저 멀리 익숙한 대문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보였다. 그 불빛을 향해 마지막 힘을 짜내 손을 뻗는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으며 잠에서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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