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길몽은 복과 행운이 찾아온다는 반가운 신호로 여겨졌습니다. 돼지·용·불·물처럼 밝고 상서로운 결의 꿈 이야기를 모았습니다.
길몽 이야기 55편
여기 실린 꿈 이야기와 해몽 풀이는 재미와 위안을 위한 오락 콘텐츠입니다. 실제 길흉화복을 예언하거나 보장하지 않으며, 중요한 결정은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내려 주세요.
길몽 이야기 1
먹구름이 낮게 깔린 하늘 아래 서 있는데, 저 멀리 산등성이가 갈라지듯 우르릉 울리더니 커다란 황금 용이 구름을 뚫고 솟아올랐다. 비늘 하나하나가 햇빛을 받아 눈이 부시게 반짝였고, 그 빛이 번지자 잿빛이던 세상이 순식간에 금빛으로 물들었다. 용은 나를 지나치려다 고개를 돌려 가만히 내려다보았는데, 그 눈빛이 무섭기는커녕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따뜻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꼬리를 붙잡자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며 함께 하늘로 딸려 올라갔다. 발밑으로 강과 들판이 아득히 멀어지고, 바람이 뺨을 스칠 때마다 가슴속에 막혀 있던 무언가가 시원하게 뚫리는 기분이었다. 용이 구름 위에서 크게 한 바퀴 돌자 온 하늘이 황금빛 물결로 일렁였고, 그 눈부신 빛 속에서 나는 이제 무슨 일이든 잘 풀릴 거라는 확신에 벅차올랐다.
길몽 이야기 2
오래된 시골집 마당 한켠에 이끼 낀 돌우물이 하나 있었다. 무심코 안을 들여다보니 물이 거울처럼 맑아 바닥까지 훤히 비쳤고, 그 속에서 잉어 세 마리가 은빛 비늘을 반짝이며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신기해서 조심스레 손을 담그자 한겨울인데도 물은 목욕물처럼 따뜻했고, 손끝을 타고 온기가 팔뚝까지 스며들었다. 그러자 가장 큰 잉어가 나를 알아본 듯 다가오더니, 물살을 가르며 내 손바닥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파닥이는 몸이 어찌나 매끄럽고 생기가 넘치는지, 손안에서 작은 심장이 힘차게 뛰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나머지 두 마리도 뒤따라 수면 위로 뛰어올라 물방울을 흩뿌렸고, 그 물방울 하나하나가 아침 햇살을 받아 보석처럼 빛났다. 마당 가득 맑은 물 내음이 퍼지는 가운데, 오래 기다려 온 좋은 소식이 곧 찾아올 것만 같은 예감에 마음이 환해졌다.
길몽 이야기 3
새벽녘 대문 여는 소리에 마당을 내다보니 통통한 돼지 여러 마리가 줄지어 들어오고 있었다. 윤기 흐르는 등짝이 아침 햇살에 반질반질 빛났고, 앞선 놈이 나를 올려다보며 웃는 듯 코를 킁킁댔다. 뒤따르던 새끼들까지 꼬리를 살랑이며 내 발치를 맴돌자 흙냄새와 함께 온기가 훅 끼쳐 왔다. 이상하게도 무섭거나 성가시지 않고, 마당 가득 들어찬 그 무게가 오히려 마음을 든든하게 채워 주었다. 나는 문지방에 기대선 채 한참을 그 광경을 바라보았고, 깨어난 뒤에도 배부른 듯한 넉넉함이 가슴에 남아 있었다.
길몽 이야기 4
허름한 마루 끝에 돌아가신 할머니가 앉아 계셨다. 주름진 얼굴이 환하게 펴지며 나를 향해 손짓하셨고, 무릎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밥 한 그릇이 놓여 있었다. 어서 먹으라며 건네주시는 손이 예전 그대로 따뜻했다. 밥알 하나하나가 윤기로 반짝였고, 한 술 뜨자 구수한 냄새가 코끝을 채웠다. 나는 목이 메면서도 오랜만에 배부르게 그 밥을 다 비웠고, 할머니는 그저 흐뭇하게 내 등을 쓸어 주셨다. 볕 좋은 마당에는 빨래가 널려 하늘거렸고, 어디선가 참새 지저귀는 소리가 정겹게 들려왔다. 깨어난 아침, 입안에 남은 따스한 온기에 한참을 이불 속에서 뭉그적거렸다.
길몽 이야기 5
한밤중 눈을 뜨니 새빨간 불길이 온 집을 휘감고 있었다. 놀라 벌떡 일어났지만 신기하게도 조금도 뜨겁지 않았다. 불꽃은 붉은 비단처럼 춤추듯 일렁이며 벽을 타고 천장으로 번졌고, 이내 나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매캐한 연기 대신 은은한 온기만이 온몸을 휘돌았고, 방 안은 붉은 노을처럼 환하게 밝아 왔다.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마저 자장가처럼 다정하게 들려왔고, 붉은 빛무리가 방 안 구석구석을 감싸며 일렁였다. 나는 두려움 대신 묘한 평안 속에서 그 불빛을 오래 바라보았다. 잠에서 깨어나 이불을 걷었을 때도, 손끝과 뺨에는 그 다정한 온기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길몽 이야기 6
가파른 산길을 오르고 또 올라 마침내 산꼭대기에 섰다. 눈앞에는 손 닿을 듯 가까이 커다란 보름달이 떠 있었고, 나는 홀린 듯 두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아 안았다. 달은 솜사탕처럼 놀랍도록 가벼웠고, 서늘하면서도 포근한 감촉이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품에 꼭 안자 은은한 빛이 가슴에서부터 온몸으로 천천히 스며들었고, 발끝까지 환하게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산 아래로는 잠든 마을이 달빛에 젖어 고요히 빛났고, 밤바람이 옷깃을 스치며 풀 냄새를 실어 왔다. 나는 그 벅찬 밝음을 가슴 가득 안은 채, 세상을 다 얻은 듯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길몽 이야기 7
여름 볕이 내리쬐는 밭에 들어서자 새빨갛게 익은 고추와 토마토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손을 뻗을 때마다 잘 익은 것들이 톡톡 따졌고, 나는 신이 나서 바구니를 가득 채웠다. 손끝마다 알싸하면서도 향긋한 풀 냄새가 진하게 배었고, 토마토를 딸 때는 잘 익은 단내가 훅 끼쳐 왔다. 바구니가 넘칠 듯 무거워졌지만 이상하게도 발걸음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밭고랑 사이로 부는 바람에 이마의 땀이 식었고, 잘 익은 채소들이 햇빛을 받아 보석처럼 반들거렸다. 나는 붉게 물든 수확물을 두 팔 가득 안고, 흥에 겨워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향했다.
길몽 이야기 8
짙푸른 숲 그늘에서 새하얀 호랑이 한 마리가 소리 없이 걸어 나왔다. 커다란 몸집에 숨이 멎을 듯했지만, 녀석은 내 앞에 조용히 다가와 앞발을 접고 엎드렸다. 무서움을 누르고 조심스레 등을 쓰다듬자 뜻밖에도 골골 소리를 내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두툼한 털이 손바닥에 부드럽게 감겼고, 따뜻한 체온이 전해졌다. 호랑이는 몸을 낮춰 나를 등에 태웠고,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숲을 가로질러 마을 어귀까지 데려다주었다. 내려선 뒤 돌아보니, 녀석은 눈인사하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숲으로 사라졌다.
길몽 이야기 9
햇살이 부서지는 맑은 강가에 앉아 있는데, 저 멀리서 커다란 물고기 떼가 은빛 비늘을 번뜩이며 내 쪽으로 헤엄쳐 왔다. 물살을 가르는 지느러미가 만드는 잔물결이 발치까지 밀려왔다. 신기하게도 손을 뻗을 때마다 물고기가 스스로 손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고,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연신 그것들을 그물에 담았다. 어느새 그물은 파닥이는 물고기로 가득 차 햇빛에 눈부시게 반짝였다. 서늘한 강물 냄새와 손바닥에 남은 미끄러운 감촉이 생생했고, 넘칠 듯 묵직한 그물을 어깨에 걸치자 뿌듯함이 가슴을 채웠다.
길몽 이야기 10
잔뜩 흐린 하늘에서 문득 금빛 비가 소리 없이 내리기 시작했다. 빗줄기 하나하나가 햇살을 머금은 듯 반짝였고, 세상이 온통 노란빛으로 물들었다. 손바닥을 활짝 펴자 빗방울이 닿는 순간 작은 금가루로 변해 손 위에 소복이 쌓였다. 놀라 주위를 둘러보니 온 동네 사람들이 하나둘 지붕 위로 올라와 두 팔을 벌리고 그 비를 맞고 있었다. 웃음소리와 감탄이 골목마다 번졌고, 나 역시 얼굴을 하늘로 향한 채 그 상서로운 빗물을 온몸으로 받았다. 반짝이는 금가루가 마을 전체를 부드럽게 뒤덮었다.
길몽 이야기 11
비 갠 아침, 우리 집 대문 앞에서 시작된 커다란 무지개가 하늘 끝까지 곧게 뻗어 있었다. 일곱 빛깔이 어찌나 또렷한지 손으로 만져질 것만 같았다. 홀린 듯 다가가 무지개 다리에 첫발을 딛자, 놀랍게도 단단하게 발을 받쳐 주었다. 한 걸음 오를 때마다 발밑에서 은은한 종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고, 그 울림이 온 하늘로 잔잔히 번져 나갔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우리 집 지붕과 마당이 색색의 빛에 물들어 있었다. 나는 종소리에 발맞춰 조금씩 높이 올라갔고, 가슴은 설렘으로 가득 차올랐다.
길몽 이야기 12
이른 아침 마당에 새하얀 학 한 마리가 사뿐히 내려앉았다. 눈처럼 흰 깃털이 햇살에 은은하게 빛났고, 긴 목을 우아하게 굽히는 자태가 그림처럼 고왔다. 혹여 놀랄까 조심스레 다가가자 학은 도망치기는커녕 나를 향해 커다란 날개를 활짝 펴 보였다. 순백의 날개가 마당 가득 그늘을 드리우며 부드러운 바람을 일으켰다. 그 바람결에 깃털 하나가 하늘하늘 떨어져 내 손바닥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감촉에 마음이 절로 맑아졌고, 학은 다시 우아하게 목을 세운 채 나를 오래 바라보았다.
길몽 이야기 13
가을볕이 좋은 날, 오래된 밤나무 아래에 서자 잘 여문 알밤이 후드득 쏟아지기 시작했다. 가시투성이 밤송이가 툭툭 벌어지며 반들반들한 알밤을 토해 냈고, 주워 담고 또 담아도 끝없이 떨어졌다. 주머니가 불룩해지고 두 팔로 안아도 남을 만큼 알밤이 발밑에 수북이 쌓였다. 하나를 집어 껍질을 까 보니 속살이 황금처럼 노랗게 빛나며 고소한 냄새를 풍겼다. 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떨어지는 밤을 이리저리 두 손으로 받아 냈고, 발밑에는 어느새 알밤이 언덕처럼 쌓여 갔다.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가을 햇살마저 알밤처럼 노랗게 부서져 내렸다.
길몽 이야기 14
저녁 무렵 마당에서 올려다보니 커다란 구렁이 한 마리가 우리 집 지붕 위로 유유히 기어오르고 있었다. 굵직한 몸통이 기왓장을 타고 미끄러지듯 움직였고, 이윽고 지붕 한가운데에 커다랗게 똬리를 틀었다. 보통이라면 소름이 돋았을 텐데, 이상하게도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녀석이 지그시 감은 눈으로 집 전체를 굽어살피며 지켜 주는 듯해, 마음이 신기하리만치 편안하게 가라앉았다. 어둠이 내려도 그 검은 몸은 든든한 파수꾼처럼 그 자리를 지켰고, 나는 오래된 집이 오늘따라 더없이 안전하게 느껴졌다.
길몽 이야기 15
마른 흙만 밟히던 마당 한가운데서 문득 맑은 샘물이 퐁퐁 솟아나기 시작했다. 작은 물줄기가 보글보글 거품을 일으키며 점점 넓게 퍼졌고, 햇빛을 받아 유리알처럼 반짝였다. 두 손으로 떠 한 모금 마시자 얼음처럼 시원한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 온몸의 열기를 단숨에 식혀 주었다. 샘은 마르기는커녕 점점 세차게 솟아 넘쳐흘렀고, 그 물길이 마당을 지나 밭고랑까지 스며들며 온 밭을 촉촉하게 적셨다. 시들었던 작물들이 물기를 머금고 파릇하게 살아나는 모습에,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그 곁에 앉아 있었다.
길몽 이야기 16
너른 들판 한가운데, 눈부시게 흰 백마 한 마리가 나를 기다리듯 서 있었다. 훌쩍 올라타자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 힘차게 앞으로 내달렸다.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동안 은빛 갈기가 내 뺨을 스치며 시원하게 나부꼈고, 말발굽 소리가 대지를 경쾌하게 두드렸다. 놀랍게도 우리가 지나는 자리마다 발밑에서 형형색색 꽃이 활짝 피어나 끝없는 꽃길을 만들어 주었다. 뒤돌아보니 지나온 길이 온통 꽃밭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두 손으로 갈기를 움켜쥔 채, 이 시원한 질주가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길몽 이야기 17
안방 장롱의 낡은 서랍을 무심코 열었더니, 안쪽에서 눈부신 빛이 쏟아졌다. 반짝이는 금가락지와 곱게 세공된 은비녀가 서랍 가득 소복이 담겨 있었다. 하나를 조심스레 집어 손에 쥐자, 차가운 금속이라기보다 사람의 손처럼 따뜻한 기운이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가락지를 손가락에 끼워 보고 은비녀를 햇빛에 비춰 보는 사이, 어디선가 흥겨운 풍악 소리가 잔치라도 벌어진 듯 흥청흥청 울려왔다. 장구와 꽹과리 가락에 절로 어깨가 들썩였고, 나는 보물이 가득한 서랍을 품에 안은 채 그 신명 나는 소리에 흠뻑 젖어 들었다.
길몽 이야기 18
깊은 밤, 창을 열자 온 하늘이 검은 비단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 한가운데서 유난히 크고 밝은 별 하나가 천천히 떨리더니, 마치 나를 찾아온 듯 곧장 아래로 흘러내렸다. 놀랄 새도 없이 별은 내 품속으로 뚝 떨어졌다. 차가울 줄 알았던 그것은 갓 지핀 화롯불처럼 따뜻하고, 어린 새의 깃털처럼 부드러웠다. 두 팔로 조심스레 감싸 안자 별빛이 살결을 타고 스며들었고, 내 심장이 그 온기를 따라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가슴 안쪽에서부터 환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 나가 손끝까지 은은하게 물들었다. 나는 그 빛을 오래도록 품에 안은 채, 무언가 귀한 것이 내 삶으로 들어왔음을 조용히 느꼈다.
길몽 이야기 19
가을 들녘에 서자 눈앞이 온통 황금빛으로 출렁였다. 논마다 벼가 알알이 여물어 저마다 무거운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 있었다. 서늘한 바람이 한 줄기 불어올 때마다 이삭들은 잔물결처럼 한쪽으로 일렁였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고, 그 소리가 사락사락 귓가를 간질였다. 볕은 따습고 흙냄새는 구수했다. 여느 때 같으면 벼를 쪼아 먹으려 달려들 참새 떼도 오늘만은 얌전히 논둑 위로 물러나 자리를 비켜 주었다. 나는 두 손으로 잘 익은 이삭 하나를 가만히 쓸어 보았다. 손바닥에 닿는 낟알의 묵직한 감촉에 마음이 든든해졌고, 한 해의 수고가 넉넉한 결실로 돌아온 것만 같아 가슴이 벅찼다.
길몽 이야기 20
골짜기를 울리는 물소리를 따라가자 하얀 폭포가 벼랑을 타고 쏟아지고 있었다. 그 거센 물줄기 아래, 비늘이 구릿빛으로 번득이는 커다란 잉어 한 마리가 몸을 활처럼 휘었다. 잉어는 온 힘을 모아 물살을 거슬러 힘차게 뛰어올랐고, 정점에 다다른 순간 그 몸이 길게 늘어나며 눈부신 용으로 변했다. 지느러미는 갈기가 되고 수염이 바람에 나부꼈다. 부서진 물보라가 햇빛을 받아 커다란 무지개를 걸었고, 용은 그 무지개를 감고 하늘로 솟구쳤다. 나는 넋을 잃은 채 고개를 젖히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심장이 뛰었다. 무언가 오래 참아 온 것이 마침내 하늘 문을 여는 순간을 지켜본 기분이었다.
길몽 이야기 21
가을볕이 마당 가득 내려앉은 오후, 우리 집 감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잎이 반쯤 진 가지마다 홍시가 붉은 등불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하나하나가 속까지 익어 물렁하게 처졌고, 껍질은 저녁노을을 머금은 듯 투명하게 붉었다. 손을 뻗어 가장 잘 익은 것을 조심스레 따서 한 입 베어 물자, 입안 가득 꿀처럼 진한 단맛이 퍼졌다. 저절로 눈이 감길 만큼 달았다. 그 사이 어디선가 날아든 새들이 나뭇가지에 나란히 앉아 고운 목청으로 노래를 불러 주었다. 바람은 잔잔했고 감잎 몇 장이 발치에 살포시 떨어졌다. 넉넉한 가지와 새의 노래 사이에서, 나는 이 집에 풍요와 정이 오래 머물 것만 같은 흐뭇함에 젖었다.
길몽 이야기 22
잔잔한 바다는 유리처럼 맑아 바닥의 모래알까지 훤히 비쳤다. 물가로 다가온 커다란 거북 한 마리가 등을 내밀기에, 나는 조심스레 그 위에 올라탔다. 등딱지는 오래된 나무처럼 단단하고 따뜻했다. 거북은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물살을 갈랐고, 우리는 저 멀리 안개 속에 잠긴 섬을 향해 나아갔다. 물속을 내려다보니 빨강, 파랑, 노랑 오색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우리를 호위하듯 곁을 따라 헤엄쳤다. 그들의 지느러미가 햇빛에 은가루처럼 반짝였다. 짠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물결이 나직이 노래했다. 서두르지 않아도 반드시 닿을 곳으로 가고 있다는 느긋한 믿음에, 나는 마음이 더없이 평온해졌다.
길몽 이야기 23
구름이 걷힌 산마루에서 하얀 수염을 길게 드리운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나타났다. 산신령처럼 눈매가 깊고 온화한 그는 말없이 다가와 낡은 붓 한 자루를 내게 건넸다. 붓대는 세월이 배어 반드르르했고, 붓끝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먹기운이 감돌았다. 시키는 대로 붓을 들어 허공에 글씨를 써 보았다. 놀랍게도 획을 그을 때마다 글자들이 금빛으로 환하게 빛나며 종이도 없이 허공에 또렷이 새겨졌다. 다 쓰인 글자들은 하나씩 떠올라 하늘 높이 별처럼 흩어졌다. 노인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곤 안개 속으로 스러졌다. 나는 손에 남은 붓의 온기를 느끼며, 내 안에 잠들어 있던 귀한 재주가 비로소 깨어나는 것만 같았다.
길몽 이야기 24
이른 아침 밭에 나가 보니, 어느새 커다란 황소가 이랑을 하나도 남김없이 반듯하게 갈아 놓았다. 검고 기름진 흙이 가지런히 뒤집혀 촉촉한 냄새를 풍겼다. 일을 마친 소는 천천히 내게 다가와 순한 몸짓으로 커다란 머리를 내 어깨에 비볐다. 두 뿔에는 붉은 댕기가 곱게 매여 나풀거렸고, 콧김은 따뜻했다. 가까이서 들여다본 소의 눈은 깊은 우물처럼 맑고 선해서, 오래 바라볼수록 마음이 가라앉았다. 나는 두툼한 목덜미를 쓸어 주며 고맙다고 나직이 속삭였다. 소는 답하듯 낮게 울었다. 성실한 짐승이 미리 갈아 둔 밭을 보며, 나는 애쓴 만큼 반드시 넉넉하게 거둘 한 해가 오리라는 든든한 예감에 젖었다.
길몽 이야기 25
마당 한켠 오래된 우물에서 두레박 줄을 천천히 감아올렸다. 묵직한 무게에 물을 한가득 길었나 싶었는데, 올라온 두레박 안에는 물 대신 손바닥만 한 금붕어들이 가득 담겨 팔딱거리고 있었다. 비늘마다 아침 햇살이 튀어 마치 살아 있는 금덩이들이 넘실대는 듯했다. 놀란 나는 서둘러 마당 항아리에 그것들을 옮겨 담았다. 그러자 텅 비어 있던 항아리 밑바닥에서 맑은 물이 저절로 솟아나 차오르기 시작했고, 금붕어들은 그 안을 유유히 헤엄치며 넘실거렸다. 물은 넘칠 듯하면서도 결코 흘러내리지 않았다. 마르지 않고 스스로 차오르는 그 항아리를 바라보며, 나는 재물과 복이 끊이지 않고 이 집에 고여 들 것만 같아 가슴이 부풀었다.
길몽 이야기 26
따스한 봄 들판을 홀로 걷고 있는데, 저편에서 나비 떼가 색색의 구름처럼 뭉게뭉게 몰려왔다. 노랑, 흰색, 연분홍 날개들이 햇빛 속에서 어지러이 흩날리며 순식간에 나를 부드럽게 에워쌌다. 처음엔 어리둥절했지만 나비들은 조금도 겁내는 기색 없이 내 어깨에, 머리카락에, 내민 손끝에 사뿐사뿐 내려앉았다. 그 무게라곤 느껴지지 않는 가벼운 감촉이 간지러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나비들이 날개를 접었다 펼 때마다 어디선가 묻혀 온 꽃가루가 금빛 안개처럼 흩날려 온몸을 감쌌다. 들판 가득 은은한 꽃향기가 번졌다. 봄의 온기와 색채에 폭 파묻힌 채, 나는 오래 기다린 좋은 소식들이 나를 찾아온 것 같아 마음이 환해졌다.
길몽 이야기 27
저물녘 마루에 앉아 있는데, 어른 두 손을 합친 것만큼이나 커다란 두꺼비 한 마리가 느릿느릿 문지방을 넘어 마당으로 들어왔다. 등은 울퉁불퉁했지만 어딘가 점잖고 복스러운 생김새였다. 두꺼비는 서두르는 법 없이 마당을 가로질러 마루 밑 그늘진 자리에 묵직하게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예로부터 두꺼비가 집에 들면 복을 부른다던 옛말이 문득 떠올랐다. 신기하게도 그가 자리를 잡은 그날따라, 그늘졌던 집 안 구석구석이 온통 환하게 밝아 보였고 공기마저 넉넉하고 포근하게 느껴졌다. 나는 두꺼비를 쫓지 않고 물 한 그릇을 곁에 놓아 주었다. 오래도록 머물러 달라는 마음으로. 든든한 손님을 맞은 듯,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마음 편히 잠들었다.
길몽 이야기 28
찬 바람이 도는 아침, 장독대에 올라 가장 큰 항아리의 무거운 뚜껑을 두 손으로 조심스레 열었다. 순간 안에서 하얀 김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며 은은하고 구수한 향이 얼굴을 감쌌다. 오래 곰삭아 깊어진, 어머니의 부엌에서 나던 것 같은 정겨운 냄새였다. 안을 들여다보니 맑고 진한 국물이 그득히 담겨 김을 올리고 있었다. 나는 곁에 놓인 나무 국자로 그 국물을 한 술 떠서 후 불어 넘겼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순간, 뱃속에서부터 따뜻한 기운이 번져 손끝 발끝까지 온몸이 노곤하게 데워졌다. 얼었던 마음까지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 항아리 하나에 이토록 넉넉한 온기가 갈무리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나는 이 집 살림이 두고두고 풍족하리라 느꼈다.
길몽 이야기 29
어스름이 내리는 저녁, 마을에서 가장 높은 누각에 올라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굽어보았다. 발밑으로 온 마을이 손바닥처럼 펼쳐져 있었다. 집집마다 하나둘 등불이 켜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골목골목이 따뜻한 주홍빛으로 물들어 별을 흩뿌린 듯 반짝였다. 그 불빛 사이로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는 손을 높이 흔들었고, 웃음소리와 정겨운 부름이 바람을 타고 누각 위까지 올라왔다. 그때 어디선가 펑, 펑 축포가 터져 밤하늘에 오색 불꽃이 활짝 피었다가 스러졌다. 나는 그 환한 빛의 물결을 내려다보며 가슴이 뜨거워졌다. 높은 곳에 올라 많은 이의 마음을 한눈에 품은 듯한 이 밤이, 곧 다가올 영광의 예고인 것만 같았다.
길몽 이야기 30
티 없이 맑은 하늘에 문득 눈부신 그림자가 드리우기에 올려다보니, 봉황 한 쌍이 커다란 날개를 펼치고 우아하게 날아오고 있었다. 그 깃털은 붉고 푸르고 노란 오색으로 눈부시게 빛나, 지날 때마다 하늘에 무지갯빛 자락을 끌었다. 봉황들은 우리 집 위로 다가오더니 지붕을 천천히 세 바퀴 돌았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그러곤 목을 길게 빼어 청아하게 울었는데, 그 소리가 온 골짜기에 맑게 울려 퍼지자 산속의 온갖 새들이 저마다 지저귀며 화답했다. 온 산이 노래로 가득 찼다. 나는 마당 한가운데 서서 그 상서로운 광경에 넋을 잃었다. 귀한 손님이, 큰 경사가 이 집을 찾아드는 조짐만 같아 가슴이 벅차게 뛰었다.
길몽 이야기 31
누군가 내 손바닥에 작고 단단한 씨앗 한 알을 올려놓았다.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사이, 씨앗은 순식간에 초록 싹을 밀어 올렸다. 싹은 눈 깜짝할 새 줄기가 되고 가지를 뻗더니, 내 키를 훌쩍 넘는 튼튼한 나무로 자라 올라 손바닥 위에서 뿌리를 내렸다. 잎사귀가 무성해지자 가지마다 탐스러운 열매가 주렁주렁 붉게 익어 갔다. 나는 그 열매를 하나하나 따서 곁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손에서 손으로 열매가 건네질 때마다, 사람들의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활짝 피어났다. 나눌수록 나무에는 다시 새 열매가 맺혀 결코 줄지 않았다. 작은 씨앗 하나가 이토록 많은 이를 웃게 하는 것을 보며, 나는 벅찬 보람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길몽 이야기 32
새소리를 따라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자, 이끼 낀 바위 틈에서 맑은 옹달샘이 조용히 솟고 있었다. 그 곁에 사슴 한 마리가 목을 숙여 물을 마시고 있었다. 인기척에 고개를 든 사슴은 도망치기는커녕, 크고 검은 눈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 사뿐사뿐 다가왔다. 가지처럼 뻗은 뿔에는 새벽이슬이 구슬처럼 조롱조롱 맺혀 아침 햇살에 반짝였다. 나는 숨을 죽이고 손을 내밀었다. 사슴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혀로 내 손을 살며시 핥더니, 떠나지 않고 그대로 내 곁에 다소곳이 머물렀다. 그 온순한 온기가 손끝을 타고 마음으로 스몄다. 깊은 산이 내게 귀한 벗을 보내 준 것만 같아, 나는 오래도록 그 자리에 앉아 사슴과 함께 샘물 소리를 들었다.
길몽 이야기 33
멀리 수평선에서 커다란 배 한 척이 만선의 깃발을 펄럭이며 항구로 들어왔다. 뱃머리가 물살을 가르며 다가올수록 갑판 위 그물마다 은빛 생선이 산더미처럼 가득 차 있는 것이 보였다. 비늘에 아침 햇살이 부딪혀 온 바다가 은가루를 뿌린 듯 반짝였다. 부둣가에 모인 사람들이 두 팔을 높이 들고 환호하며 나를 반겼고, 누군가는 내 손을 잡고 흔들었고, 아이들은 갑판 위로 뛰어올라 팔짝팔짝 뛰었다. 갈매기들이 배 위를 빙빙 돌며 끼룩끼룩 울었다. 짭조름한 바닷바람 속에서 나는 이 넉넉한 풍요가 이제 막 시작되는 것임을 예감하며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서 벅찬 가슴을 가라앉혔다.
길몽 이야기 34
깊은 밤중이었는데 문득 마당이 대낮처럼 환해져 무슨 일인가 싶어 맨발로 나가 보았다. 하늘에 떠 있어야 할 커다란 달이 어느새 내 코앞까지 둥글게 내려와 처마 끝에 걸려 있었다. 서늘하면서도 부드러운 빛이 온 마당을 은은하게 적셨다. 홀린 듯 손을 뻗자 달은 놀라지도 않고 내 손금을 따라 맑은 빛을 조르르 흘려보냈다. 손바닥 안에 고인 달빛이 따뜻하게 맥박처럼 뛰었고, 손끝에서 은은한 향까지 배어 나오는 듯했다. 나는 그 빛을 조심스레 가슴에 품으며, 앞으로 어떤 어둠이 몰려와도 나를 환히 밝혀 줄 귀한 무언가를 얻었다고 느꼈다. 마당의 풀벌레 소리마저 그 빛에 잠겨 고요했다.
길몽 이야기 35
이른 아침 논둑길을 천천히 걷는데, 발을 디딜 때마다 발밑에서 맑은 샘이 하나둘 퐁퐁 솟아올랐다. 차고 투명한 물줄기들이 서로 이어지더니 이내 작은 개울을 이루어 졸졸 소리를 내며 앞서 흘러갔다. 나는 그 물길에 이끌리듯 개울을 따라 내려갔다. 갈대숲을 지나 모퉁이를 돌자, 눈앞에 넓고 잔잔한 호수가 거울처럼 펼쳐졌다. 물 위로 하늘과 구름이 고스란히 내려앉아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수면을 바라보며, 나는 마음속 오래된 갈증이 비로소 가득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발밑에서 시작된 작은 샘이 이토록 넓은 호수가 되었다는 사실이, 앞으로 다가올 나의 나날을 말없이 일러 주는 듯했다.
길몽 이야기 36
울창한 산에서 커다란 곰 한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내려왔다. 겁이 나 물러서려는데, 곰은 앞발로 조심스레 꿀이 뚝뚝 흐르는 벌집을 받쳐 들고 내게 내밀었다. 그 눈빛이 어찌나 순하던지 두려움이 스르르 녹았다. 손가락으로 꿀을 찍어 입에 넣으니 진하고 달콤한 향이 혀끝에서 퍼지며 온몸 구석구석에 뜨끈한 힘이 돌았다. 손끝 발끝까지 기운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곰은 내가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왔던 산길을 되짚어 유유히 사라졌다. 나는 빈 벌집을 손에 든 채, 크나큰 복과 든든한 기운이 함께 나를 찾아온 것을 알았다.
길몽 이야기 37
맑은 하늘 저편에서 오색 연이 수십 개나 두둥실 떠오르더니, 마치 나를 부르듯 내 머리 위로 몰려와 커다란 원을 그리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붉고 푸르고 노란 연들이 바람을 타고 서로 어우러지는 모습이 눈부셨다. 홀린 듯 늘어진 연줄 하나를 잡자, 놀랍게도 내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며 두둥실 떠올랐다. 발밑으로 마을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초가지붕과 논밭, 굽이진 길이 손바닥 안에 담겼다. 바람을 가르며 오색 연들과 함께 하늘을 도는 동안, 나는 이 높이에서 내려다보는 나의 앞날이 온통 밝고 화사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길몽 이야기 38
저녁 무렵 부엌 아궁이에 마른 장작을 넣고 불을 지피자, 불꽃이 이내 활활 타오르며 붉은 혀를 날름거렸다. 탁탁 튀는 불티 소리와 함께 방 안 가득 따뜻한 온기가 밀려들어 손끝까지 노곤하게 데워졌다. 아궁이 위 커다란 가마솥에서는 밥이 넘칠 듯이 부풀어 올라, 뚜껑 틈으로 하얀 김이 뭉게뭉게 새어 나왔다. 구수한 밥 냄새가 온 집안을 감쌌다. 나는 그 넉넉하고 그득한 온기 앞에서, 굶주림도 추위도 없는 풍요로운 나날이 바로 이 아궁이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느끼며 흐뭇하게 웃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마치 앞날의 흥성함을 미리 보여 주는 것 같았다.
길몽 이야기 39
맑은 연못에 이르니 연꽃이 한꺼번에 봉오리를 터뜨리며 피어나, 초록 잎들 사이로 넓은 물 위를 온통 은은한 분홍빛으로 물들였다. 그 광경이 어찌나 곱던지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넓고 도톰한 꽃잎 위에 살며시 앉으니, 맑고 그윽한 향기가 옷깃을 파고들어 온몸을 부드럽게 감쌌다. 마음속 근심마저 향기에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곁에서는 투명한 날개의 잠자리가 나를 반기듯 빙글빙글 맴돌았다. 나는 이 청아하고 상서로운 자리에서, 앞으로 내 삶에 맑은 복이 활짝 피어나리라 믿었다.
길몽 이야기 40
한밤중 방문을 열어 두고 잠들었는데, 커다란 잉어 한 마리가 물살을 일으키며 방 안까지 헤엄쳐 들어와 내 이불 위에서 펄떡펄떡 뛰었다. 놀라 일어나 두 손으로 그 미끈한 몸을 조심스레 안아 올리자, 팔뚝만 한 잉어의 비늘이 등잔불 아래에서 눈부신 금빛으로 번쩍였다. 손안에서 힘차게 꿈틀대는 생명의 무게가 묵직하게 전해졌다. 가슴이 벅차오르고 알 수 없는 기쁨이 목까지 차올랐다. 나는 이 귀한 손님이 내게 크나큰 재물과 경사를 몰고 온 것이라 여기며, 금빛으로 빛나는 잉어를 두 팔로 꼭 끌어안았다. 방 안 가득 물비린내 대신 맑고 시원한 기운이 감돌았다.
길몽 이야기 41
안개가 자욱한 산길을 오르다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소매 속에서 잘 익은 복숭아 하나를 꺼내 내게 건넸다. 발그레하게 물든 복숭아에서는 달콤한 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두 손으로 받아 한 입 크게 베어 무니, 시원하고 향긋한 과즙이 입안 가득 퍼지며 온몸이 씻은 듯 개운해졌다. 묵은 피로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듯했다. 노인은 흡족한 얼굴로 나를 한 번 바라보고는 천천히 안개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나는 신선이 내린 귀한 복을 받았음을 알았다.
길몽 이야기 42
아침에 눈을 떠 우물가로 나갔더니,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던 자리에 커다란 소나무 한 그루가 하룻밤 사이 우뚝 솟아 있었다. 짙푸른 가지가 하늘을 향해 넉넉하게 뻗어 있었다. 놀라워하며 올려다보니, 굵은 가지마다 새하얀 학들이 한 마리씩 내려앉아 깃털을 다듬으며 편안히 쉬고 있었다. 청량한 솔향이 마당 가득 번졌다. 뿌리께에서는 맑고 시원한 물이 쉼 없이 솟아 우물을 넘칠 듯 채웠다. 나는 이 상서로운 나무가 우리 집에 오래도록 번영과 장수를 가져다줄 것임을 예감했다.
길몽 이야기 43
장날을 맞아 좌판을 펼치고 물건을 늘어놓자마자, 손님들이 끝도 없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쪽에서 값을 치르면 저쪽에서 손을 내밀어, 나는 정신없이 물건을 싸고 거스름돈을 내주었다. 엽전이 짤랑짤랑 쏟아지듯 들어와 돈궤가 어느새 묵직하게 가득 찼다. 손끝이 얼얼할 만큼 바빴지만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저녁 무렵 해가 뉘엿해질 즈음에는 좌판 위에 남은 물건이 단 하나도 없이 말끔하게 다 팔려 나갔다. 텅 빈 좌판과 두둑한 돈궤를 보며, 나는 어깨가 절로 들썩이도록 흥이 났다.
길몽 이야기 44
티 없이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커다란 흰 구름이 뭉게뭉게 모여들더니 봉긋한 산봉우리 모양으로 뭉쳐 내 앞에 든든하게 자리를 잡았다. 솜처럼 부드러워 보이는 그 구름이 나를 오라 손짓하는 듯했다. 조심스레 발을 올리니 구름은 폭신하게 나를 받쳐 주었고, 나는 그 위로 사뿐히 올라섰다. 발밑으로 세상이 아득히 멀어졌다. 그 순간 내 발끝에서 붉고 푸른 무지개가 스르르 피어나 하늘 저편까지 곱게 다리를 놓았다. 나는 이 눈부신 자리에서 내 앞길이 무지개처럼 환하게 열리는 것을 보았다.
길몽 이야기 45
새벽에 문을 열자 마당에는 흰 눈이 소복소복 쌓여 온 세상이 은빛으로 고요했다. 맨발로 조심스레 눈밭을 밟았는데, 이상하게도 발이 시리기는커녕 솜이불처럼 포근하고 따뜻한 기운이 발바닥을 감쌌다. 뽀드득 소리마저 정겨웠다. 그렇게 눈밭을 거니는데, 하얀 눈 위로 붉은 동백꽃이 한 송이씩 톡톡 피어나기 시작했다. 흰 눈과 붉은 꽃이 어우러진 그 빛깔이 어찌나 고운지 눈을 뗄 수 없었다. 차가운 계절 속에서도 피어나는 그 붉은 생명을 바라보며, 나는 머잖아 찾아올 따뜻한 경사를 예감했다.
길몽 이야기 46
동네 어귀 커다란 가마솥에서 하얀 김을 무럭무럭 피워 올리며 떡이 끝도 없이 쪄져 나왔다. 시루를 열 때마다 말랑하고 따끈한 떡이 그득그득 담겨 나오는데, 그 구수한 냄새가 온 골목에 퍼졌다. 나는 김이 오른 떡을 손에 손에 들고 지나가는 이웃마다 넉넉히 나누어 주었다. 신기하게도 아무리 퍼내고 나누어도 솥 안의 떡은 조금도 줄지 않고 다시 그득 차올랐다.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웃고 떠들며 떡을 맛보니, 어느새 온 동네가 흥겨운 잔칫집이 되었다. 나는 이 마르지 않는 넉넉함이 참으로 든든했다.
길몽 이야기 47
한여름 맑은 계곡에 이르러 바위에 걸터앉아 시원한 물에 두 발을 담갔다. 그러자 어디선가 은어 떼가 몰려와 내 발가락 사이사이를 간질간질 스치며 지나갔다. 매끄러운 지느러미가 살갗을 건드릴 때마다 웃음이 새어 나올 만큼 간지러웠다. 맑은 물속에서 은빛 몸통이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장난삼아 두 손으로 계곡물을 한 움큼 떠올렸더니, 손바닥 안에서 작은 물고기 한 마리가 파닥이며 나를 올려다보고 방긋 웃는 것만 같았다. 나는 이 청량하고 생기 넘치는 물가에서, 내 삶에도 맑은 복이 흘러들 것을 느꼈다.
길몽 이야기 48
높은 대문 위에 걸린 커다란 청사초롱 한 쌍이 누가 불을 붙인 것도 아닌데 저절로 환하게 타올랐다. 붉고 푸른 불빛이 어스름 저녁 골목을 물들이자, 어디선가 길손들이 하나둘 그 빛을 따라 모여들기 시작했다. 낯선 이들인데도 얼굴마다 웃음이 가득했다. 넓은 마당에는 어느새 멍석이 깔리고 김이 오르는 상이 차려졌으며, 흥겨운 풍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대문 앞에 서서 그 따뜻한 불빛과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잔치는 밤이 깊도록 끊이지 않았고, 초롱은 새벽까지 꺼지지 않을 듯 환했다.
길몽 이야기 49
눈처럼 새하얀 코끼리가 커다란 연꽃 한 송이를 코에 곱게 감고서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코끼리는 내 앞에 이르자 앞다리를 접고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그 눈빛이 어찌나 온화하던지, 나는 두려움 없이 손을 내밀어 이마를 쓰다듬었다. 등에 올라타자 코끼리는 유유히 들판을 가로질러 걸었고, 지나는 자리마다 온 들판의 꽃들이 우리를 향해 나란히 고개를 숙였다. 바람에 실려 오는 꽃향기가 코끝을 간질였고, 햇살은 코끼리의 등을 금빛으로 물들였다. 나는 이 상서로운 짐승이 나를 어딘가 귀한 곳으로 데려가리라 믿으며 그 넓은 등에 몸을 맡겼다.
길몽 이야기 50
밤이 깊어 잠에서 문득 눈을 뜨니, 창밖의 은하수가 마치 강물처럼 넘실거리며 흐르고 있었다. 그 반짝이는 물줄기는 이내 내 방 창문을 넘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놀라기보다 홀린 듯 두 손을 내밀어 흘러드는 별빛을 받았다. 손바닥 위로 차가우면서도 따스한 빛이 고였고, 손금 사이사이로 자잘한 별들이 강처럼 반짝이며 흘렀다. 방 안 가득 은은한 은빛이 감돌았고, 나는 그 빛의 강 속에 두 손을 담근 채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이 밤의 별빛이 앞으로의 나날을 환히 비춰 줄 것만 같아 가슴이 벅차올랐다.
승인대기 2
이끼 낀 우물가에 무릎을 대고 맑은 물속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바닥까지 훤히 비치는 물 속에서 잉어 세 마리가 은빛 비늘을 반짝이며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지느러미를 흔들 때마다 잔물결이 동그랗게 번져 나갔고, 물빛은 아침 햇살처럼 부드러웠다. 나는 홀린 듯 손을 담갔는데, 차가울 줄 알았던 물이 봄볕처럼 따뜻해 놀랐다. 그 순간 가장 큰 잉어 한 마리가 힘차게 물살을 가르며 내 손바닥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파닥이는 몸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팔을 타고 가슴까지 번졌고, 나머지 두 마리도 나를 올려다보며 맴돌았다. 이상하게도 마음속에 오래 맺혀 있던 근심이 그 맑은 물에 씻겨 내려가는 듯 개운했다.
길몽 이야기 52
어릴 적 살던 집 마당엔 오래된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꿈속에서 그 우물 물이 소리 없이 넘쳐흘러 마당을 가득 채웠다. 놀라 가장자리를 붙잡고 들여다보니, 맑은 물속에서 금빛 잉어 한 마리가 천천히 떠올라 내 손바닥 위로 사뿐히 뛰어올랐다. 비늘 하나하나가 햇빛처럼 반짝였고, 손에 닿는 순간 따뜻한 온기가 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물은 어느새 마당을 넘어 골목과 온 동네를 은은하게 적셨지만 누구도 젖지 않았고, 오히려 사람들이 웃으며 그 맑은 물가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아이들은 발을 담그고 웃음을 터뜨렸고, 어른들은 오래된 이웃처럼 정겹게 인사를 나눴다. 잠에서 깨어난 뒤에도 손바닥 한가운데 그 따뜻한 온기가 오래도록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길몽 이야기 53
돌아가신 할머니가 하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부엌에 서 계셨다. 아무 말 없이 인자하게 웃으시며 커다란 가마솥 뚜껑을 여시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흰 쌀밥이 산처럼 소복이 담겨 있었다. 할머니는 주걱으로 밥을 퍼 내 밥그릇에 자꾸만 얹어 주셨는데, 아무리 먹어도 그릇은 줄기는커녕 점점 더 수북해졌다. 밥알에서는 갓 지은 은은한 단내가 났고, 한 술 뜰 때마다 마음속에 쌓여 있던 걱정이 하나씩 스르르 녹아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창으로 스민 아침 햇살이 할머니의 흰 옷깃을 부드럽게 감쌌다. 마지막에 할머니가 내 등을 가만히 토닥이며 이제 다 괜찮다고 나직이 말씀하시는 순간, 그 온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잠에서 깼다.
길몽 이야기 54
산 정상에 올라 아득한 절벽 끝에 서자, 몸이 문득 깃털처럼 가벼워지더니 자연스럽게 하늘로 두둥실 떠올랐다. 두렵기는커녕 오히려 오래 잊고 있던 감각이 되살아난 것처럼 편안했다. 손으로 부드러운 구름을 헤치며 날아가는데, 발아래로 내가 살던 도시와 굽이치는 강, 드넓은 들판이 한눈에 시원하게 펼쳐졌다. 새들이 양옆에서 나란히 날개를 저으며 길을 안내했고, 저 멀리 황금빛으로 곱게 물든 지평선이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바람이 뺨을 스칠 때마다 상쾌한 기운이 폐 깊숙이 스몄다. 마침내 그 눈부신 빛에 온몸이 닿는 순간, 따뜻한 온기가 온몸으로 번지며 이제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이 마음 깊은 곳에서 뜨겁게 차올랐다.
길몽 이야기 55
오래 방치해 두었던 화분에서 하룻밤 사이 이름 모를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꽃잎은 붉은빛과 금빛이 섞여 있었고, 향기를 맡자 코끝이 아니라 마음이 먼저 환해지는 듯했다. 신기해서 화분을 들여다보니 흙 속에서 반짝이는 엽전들이 뿌리처럼 얽혀 있었고, 꽃이 필 때마다 엽전이 하나씩 툭툭 떨어졌다. 떨어진 엽전을 주우려 손을 뻗자 꽃이 스스로 고개를 숙여 내 손바닥에 향기를 부어 주었다. 방 안 가득 퍼진 그 향기 속에서, 오랫동안 풀리지 않던 일이 곧 좋게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